Skip to content

인문/사회 [2004-08-13] 덩샤오핑 평전

장성주 2005.06.23 10:44 조회 수 : 5017 추천:206

http://www.goldenbough.co.kr/cover/8273398l.jpg중국의 오늘을 만든 사람, 덩샤오핑의 일생을 한 권으로 읽는다
‘작고 평범한 덩 씨(鄧小平)’에서 13억 중국인의 영도자까지

덩샤오핑 평전

벤저민 양(Benjamin Yang) / 권기대 옮김 / 416쪽 / 신국판(153×225㎝, 양장)                                
발행일: 2004년 8월 13일 / ISBN: 89-8273-398-1 03300 / 18,000원 /분야: 정치, 전기

편집부 담당 : 장은수(011-299-9659), 장성주(3446-8773)


1990년대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중국의 21세기를 설계한 지도자’라고 불리는 덩샤오핑의 평전이 오는 22일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을 맞아 (주)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종래의 덩샤오핑 전기가 그의 딸이나 중국 관변 사학자들의 저서인 탓에 찬사 위주로 씌어진 데 비하여, 『덩사오핑 평전』에서는 미국에서 활동한 중국인 학자 벤저민 양이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의 업적과 과오를 냉정하게 서술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공산 혁명, 항일 전쟁, 문화 대혁명, 6․4 톈안먼 사태에 이르기까지 격동하는 중국 현대사의 최전선에서 세계 제2의 대국을 이끌어 온 덩샤오핑을 진지하게 분석한다. 탁월한 정치력과 특유의 신념으로 그가 중국에 무엇을 남겼으며, 오늘날 중국은 그의 유산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나이 어린 프랑스 유학생에서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되다
중국 공산당과 함께한 덩샤오핑의 일생

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 성 광안 현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나 1920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대전 후 공황에 시달리던 프랑스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 공장 노동자가 된 덩샤오핑은 중국공산청년동맹 프랑스 지부에 가입하고, 훗날 혁명의 동지이자 경쟁자가 되는 저우언라이(周恩來), 리리싼(李立三), 차이허썬(蔡和森) 등과 함께 공산주의 이론에 빠져든다.
청년동맹 기관지 《적광(赤光)》을 만들면서 충실한 공산주의자로 다시 태어난 덩샤오핑은 이윽고 러시아로 건너가 직업 혁명가로 변신하며, 1927년 중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대장정과 항일 투쟁을 거치면서 덩샤오핑은 군인이 아닌 조직가이자 홍군(紅軍) 내에 얼마 되지 않는 엘리트 관료로 마오쩌둥의 신임을 받게 되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공산당 서남국 총서기가 되어 연고지인 중국 남서부에서 세력 기반을 다지기에 이른다.
마오쩌둥의 충성스런 지지자였던 덩샤오핑이었지만,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이 실패하여 3천만 명이 굶어죽는 참상 앞에 환상에서 깨어나 결별을 결심하고 ‘노란색이든 흰색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유명한 말로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다. 이때부터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눈 밖에 난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 당시 마오의 추종자들에게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로 쏠리는 자)’라고 비판당하며 여러 번 숙청의 위기에 몰렸다. 공식 지위를 박탈당하고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나는가 하면, 1976년 4인방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자택에 연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군부를 등에 업은 화궈펑(華國鋒) 세력의 도움으로 복귀하였고, 그로부터 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등 모든 지위를 찾고 실질적으로 중국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모두가 덩샤오핑이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 주석에 오르리라고 예상했지만, 그는 1997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거부하고 한 계단 아래에서 실력을 행사했다.
군인 출신 거물이 즐비한 중국 공산당에서 문관 출신 덩샤오핑이 최후의 승자가 된 비결은 바로 철저한 실용주의와 비상한 정치 감각에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위대한 인물이나 지난 세기의 사람들이므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중국의 국체인 공산주의마저 철저히 실용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이었다. 명목상의 지위가 아닌 실제 권력에 집중한 덩샤오핑은 언제든지 자기 세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인민해방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허가한 것은 당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냉혹한 면모도 보였다. 당시 동유럽 공산 정권이 줄줄이 붕괴되는 상황에 어떤 일이 있어도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결의가 그러한 참극을 불렀던 것이다. 저자는 당시 외국 정부의 몰아치는 비난에도 눈썹 하나 까딱 없이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그들은 조만간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며 덩샤오핑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다.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중국은 왜 그에게 열광하는가?

2004년 8월 22일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은 덩샤오핑의 업적을 논하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그의 고향에 기념 공원을 조성하는 등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처음에 마오쩌둥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로서 자기 손으로 이룩한 공산주의를 생시에 스스로 청산한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웬만큼 여유 있는(小康) 사회’라는 새로운 비전을 중국인들에게 제시했다. 중국인들은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으로 사경에 이른 중국을 되살려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도록 기반을 마련한 지도자로 덩샤오핑을 평가한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지만 가장 고마워하는 지도자는 덩샤오핑”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이야말로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자존심을 되찾아 준 지도자라고 생각하며, 그의 여러 과오나 독재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고 칭송한다. 덩샤오핑은 검소한 정치인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죽은 뒤 유품을 정리하던 아내와 딸들이 구멍이 뚫리지 않은 옷이 단 한 벌도 없음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중국의 미래에 드리운 덩샤오핑의 그림자

군부를 장악하고 철저한 정․경 분리 원칙을 세워 유지했던 덩샤오핑은 톈안먼 사태 당시 무력 진압을 지시했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당의 전권 통치에 대한 도전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려는 목적이었다. 오늘의 중국 지도부 역시 덩샤오핑의 이러한 원칙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행하고 있다.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흡사 1970년대 한국의 유신 체제를 연상시킬 만큼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는, 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외교에 있어서도 덩샤오핑이 천명한 “단호하게 대처하고 재주껏 이용하라.”라는 외교 지침이 지금껏 중국 정부가 보여 주는 강경 노선의 핵심이다. 저자는 “향후 중국에 덩샤오핑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그 인물은 내치가 아니라 외교 드라마에서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측한다. 현재의 중국은 덩샤오핑이 빚어 낸 모양대로 움직이고 있으며 중국의 오늘과 내일을 읽기 위해서는 덩샤오핑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지은이 벤저민 양
베이징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6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페어뱅크 동아시아 연구 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를 썼다. 최근까지 중국 베이징 런민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강의했다.

▶ 옮긴이 권기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부터 홍콩에 거주하며 일간지 및 잡지에 칼럼을 쓰고 있다. 영화 전문지 《키노》에 정기적으로 평론을 기고했으며 홍콩 RTHK 방송국 상임 영화 평론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